서울에서 대전, 전주를 지나 남원을 거쳐 구례읍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포구를 향해 굽이진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10여 분 정도나 달렸을까. 앞서 운조루를 다녀간 지인이 본 기자에게 길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던 토지주유소가 눈앞에 나타났다. 토지주유소에서 5분 거리라고 들었던 것을 상기하며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발 1506m의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 섬진강 줄기와 만나면서 형성된 충적평야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돌연 이곳에 관한 비기(秘記)가 떠오른 것은 그 즈음이었다. 구례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에 있어서 지사(地士)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이다. 구례의 풍수적 형국은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에서부터 그 신령스러움이 흘러오는데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용(龍)이 천황치에서 건너편 왕시루봉 줄기와 어우러져 섬진강을 끌어안은 모습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다. 또한 안산(案山)으로는 강 건너 오봉산이 머리를 조아리며 춤을 추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우리나라 풍수지리가 태어난 탯자리이기도 하다. 운조루가 위치한 토지면 오미리와 닿아 있는 장수촌으로 이름난 상사리(上沙里)와 하사리(下沙里)는 도선국사가 모래밭에서 우리나라 산천 모습을 그려 놓고 공부하여 풍수지리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쳤다는 곳이다. 이 때문에 도선국사가 모래밭에 그림을 그린 곳이라 하여 사도리(沙圖里)라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좋은 터전에다 관청과의 거리도 멀어 관리의 횡포로부터 안전하였고, 난세에는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몸을 숨길 수도 있는 곳이었기에 혹자들은 이곳을 가리켜 두 마리의 학이 춤추고 있는 쌍학지지(雙鶴之地) 청학동으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구만들’이라 불리는 이곳 평야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역사를 보면 이곳 출신들보다 외지인이 많은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사냥꾼을 피해 숨어드는 짐승처럼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사람들은 난세를 피해 이곳 구례로 찾아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근 현대까지도 이어졌다. 일본 침략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토지면 가구 수와 인구 변동의 연도별 통계를 살펴보면 1918년 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1922년 148호에 744명에 이르고 있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수탈은 날로 가혹해지고 난데없이 몰려온 서양문물이 판을 치는 격동기의 급류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였던 사람들은 환란의 세월로부터 몸을 숨겨 안위를 구하고자 이곳으로 찾아들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운조루를 세운 류이주의 팔대 손인 류맹효(문화 류씨 종친회 회장)씨의 증언에 따르면, 비기(秘記)에 ‘구만들’이라 불리는 이곳 평야 어딘가에 지리산의 후덕한 정기가 고인 금환락지(金環落地)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지리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를 통해 사람이 살기 좋은 땅으로 구례, 남원, 진주, 성주를 지목한 바 있다. 땅이 기름져서 볍씨 한 말을 뿌리면 예순 말을 쉽게 거둬들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네 지역이라는 것이다. ‘택리지’의 이야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일찍부터 많은 지사(地士)들은 이곳을 주목하였다. ‘구만들’을 안고 있는 산이 ‘옥녀봉’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사(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이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구례 땅이 자궁에 해당하는 곳으로 보았고, 지리산 끝자락에 불쑥 튀어나온 산이 바로 여성의 옥음에 해당 되는 곳으로 보았다.
금환락지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풍수지리와 관련되어 있다. 이곳 구만들엔 지사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기묘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에 이곳 지리산 형제봉에 형제신이 살았는데 이중 한 남신은 자식을 나을 수 없었다. 옥녀신 자매는 이들 형제신과 결혼토록 되어 있었는데 어느 쪽이 자식을 나을 수 없는 신인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옥녀신이 형제봉 위에 올라가 빌었더니 옥녀신의 손에 끼었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지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운조루가 위치한 토지면의 한문 표기가 현재 사용하는 ‘土旨’와 달리 ‘吐指’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전설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리산의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렸다는 내용이다. 위 이야기와 다른 것은 그때 선녀가 반지 뿐 아니라 비녀도 함께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비녀가 떨어진 금잠락지(金簪落地)를 금환락지에 버금가는 명혈(名穴)이라 언급하고 있다.
하여튼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였기에 떨어진 가락지는 생산 행위(풍요로움, 기름진 땅)를 상징하고 있다. 금환락지가 샘물처럼 풍요로움이 마르지 않는 명혈(名穴)로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땅으로 인식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늘이 아껴둔 땅 “운조루”
운조루에서 바라본 구만들 너머의 오봉산
운조루는 가옥 자체의 아름다움도 빼어나지만 한 인간의 집념이 어린 곳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명당에 대한 인간의 집념은 실로 대단하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예만 보아도 조선시대 풍수지리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집념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비단 이러한 일들이 과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미신이라 치부하면서 한편으론 소위 ‘있는’ 집안에서는 묏자리 사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대단함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구례 금환락지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가옥이 운조루이다. 이는 호남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양반 가옥으로 오랜 세월만큼 많은 이야기를 가진 곳이다. 이 역시 풍수에 대한 인간의 집념이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조루를 세운 사람은 삼수공(三水公) 류이주(柳爾胄)이다. 류이주는 1726년 경북 해안면 입석동 출신으로 28세 되던 1753(영조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개와 힘이 뛰어났고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났을 때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잡았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담대했다. 또 벼슬에 있을 때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함흥성 축조작업 등 대규모 건축사업에 봉직하여 운조루 창건자로서 손색없는 경력을 보여준다.
류이주는 경북 대구 사람인데 그가 이곳으로 이주해 온 배경은 전라도 승주에서 낙안 군수로 재직하였던 시절 이곳의 풍수지리에 매료되어 관직에서 은퇴하면 이곳에 세거를 이룰 것을 작정하였다. 류맹효씨의 증언에 따르면 류이주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신령이 나타나 ‘어딘가에 거북이 돌이 나오면 그곳이 명당이다’라고 하여 이튿날부터 7년 6개월에 걸쳐 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지금의 운조루 터를 찾았다고 하였다. (일설에는 금환락지을 찾다가 우연히 금귀몰니를 찾았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구례 오미동에는 금환락지와 더불어 3대 진혈(眞穴)인 금귀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있는데 류이주가 잡은 터는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 있다는 금귀몰니 명당이라고 한다.
창건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말해주는 류이주의 행장에는 “세상 사람들이 이 오미동 집터를 길지라고 했으나 바위가 험하여 누구도 감히 집터로 활용하지 못한 것을 공(公)이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고 말하며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터를 닦았다”라고 나와 있다.
과연 집터를 잡으면서 땅을 파보니 금귀몰니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현재의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거북이가 출토되었다. 원래 현재의 부엌자리는 안방이 들어설 자리였다. 하지만 거북자리를 안방으로 사용하면 아궁이에 불을 때기 때문에 거북이가 말라 죽는다고 하여 거북이가 나온 곳을 습기 많은 부엌자리로 배치했다고 한다.
그렇게 운조루의 집터를 잡고 칠 년에 걸친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1776년에 류이주가 함흥성 오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는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천리길을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는 전설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직도 이곳 풍수에 대한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환락지, 금귀몰니, 오보교취. 세 곳 진혈을 놓고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집터가 그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류맹효씨는 운조루 안채가 상대 금구몰니이고, 중대 금환락지는 행랑채 밖 연못자리이며 하대는 면 소재지에 있는 돌탑자리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환동(環洞) 박 부자 집터 역시 그곳이 금환락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원내리(垣內里) 사람들도 자기네 마을을 오보교취(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다섯가지 보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도움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명당으로 통한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금내리(金內里) 사람들은 금환락지가 자기 동네 안에 있기 때문에 금내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구름 속을 나는 새가 사는 집 ‘운조루’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이는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 나오는 글귀이다. 운조루(雲鳥樓)는 바로 이 문장의 첫 머리인 운(雲)과 조(鳥)를 따온 곳이다. 말을 풀이하면 ‘구름 속을 나는 새가 사는 집’, 혹은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 정도나 될 터이다.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은 一자형 행랑채와 T자형 사랑채, 그리고 ㅁ자형 안채가 연이어져 있고 동북부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700평이 넘는 대지에 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있으며, 남향의 건물들이 동서와 남북측을 주방향으로 직교하여 비를 맞지 않고도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일체화 되어 있다.
안채는 중문간을 통하여 사랑채와 연이어져 있고 안방과 대청, 건넌방, 다락, 곳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은 안주인의 일상 거처이자 침실이며 대청은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위치하여 집안의 큰일을 치루는 중심공간으로 사용된다. 네모반듯한 마당 아래쪽에는 부잣집 살림규모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장독대가 있고 안방 부엌 앞 처마 밑에는 허드렛물을 받았다가 사용하던 수조와 맷돌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운조루의 건축적 특징은 누마루방이나 누다락방을 두어 웅장한 궁전주택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의 장식적 의장을 생략하여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정남향의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아래채 기와지붕 너머로 안산격인 오봉산이 유유히 흘러가고 햇볕은 처마 깊숙이 들어와 더없이 따사로운 기운을 뿜어 준다.
명당 터 덕을 보았는지 이 집안은 대대로 부를 유지하며 가문의 명예와 권위를 드높였고 양반가로서의 특권을 누려 왔다. 창건주 유이주가 후손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남긴 기록을 보면 최소한 78칸에서 100여 칸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물이었으며 한때는 100여 명의 식솔을 거느리기도 했었다.
대문에 걸린 호랑이 뼈
운조루 대문에는 두 개의 뼈가 걸려 있다. 혹자는 말뼈라고 하지만, 운조루의 역사는 호랑이 뼈라 말한다. 류이주가 한양을 가기 위해 문경새재를 넘으려는데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에 채찍을 휘둘러 잡아서 영조대왕께 호피를 바치자 영조대왕이 백호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현재 걸려 있는 뼈는 류이주가 그 때 잡은 호랑이 뼈를 가지고 와서 액귀를 쫓고자 대문에 걸어둔 것이라고 한다.
류맹효 씨는 아울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호랑이 뼈의 신령스러움으로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낙들이 호랑이 뼈를 먹으면 애를 낳을 수 있다는 말에 밤에 몰래 와서는 조금씩 긁어 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정말로 그녀들이 효험을 얻어 아이를 낳았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는 일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운조루 곳간에는 가슴 아픈 현대사의 잔재가 상흔으로 남아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란 글귀이다. 타인능해, “누구나 열어주세요” 질펀한 기생집 아낙이나 읊조렸을 법한 이 글귀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볼품없는 뒤주에 붙어 있다. 타인능해는 정확히 말하면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내고 만든 원통형 뒤주이다. 이 뒤주의 하단부에는 가로 5cm, 세로 10cm 정도로 조그만 직사각형구멍이 만들어져 있다. 바로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 타인능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마개를 옆으로 돌리면 쌀이 나오도록 되어있다. 타인능해를 위와 달리 풀이하자면 누구나 마음대로 열어도 좋다는 의미로, 누구라도 와서 쌀을 퍼갈 수 있는 뒤주로, 이를테면 원조 ‘사랑의 쌀통’인 셈이다.
류이주는 곳간을 채우는 법에 앞서서 곳간 비우는 법을 먼저 알았다. 류이주는 타인능해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주인과 얼굴이 마주치지 않는 곳간 채에 두었다. 퍼가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생각한 배려인 것이다. 이 뒤주에는 두 가마 반 정도가 들어간다. 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의 양은 보통 1~2되 분량이었다.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7~8되씩 가져가는 양심불량한 이들은 없었다고 한다. 운조루에서 논농사가 2만평으로 연평균 200가마를 수확하였다. 쌀뒤주에 들어간 쌀이 1년에 36가마 분량이었으니, 류씨 집안은 1년 소출의 약 18%를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지출한 셈이다. 이 집의 며느리들은 월말이 되기 전이면 쌀뒤주를 보고 남아 있는 쌀을 마을의 어려운 사람에게 직접 전하기도 하였다. “덕을 베풀어야 집안이 오래간다. 당장에 이 쌀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줘라. 그믐날에는 뒤주에 쌀이 없게 하라!”는 가주의 불호령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운조루가 위치한 이곳이 동학과 여순반란사건, 6,25 좌익들의 주 활동 공간이었음에도 화염에 휩싸인 바가 없는 이유도 이러한 타인능해의 정신 때문이었다. 류맹효 씨는 마을 대부분이 운조루의 노비들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갈취하지 않고 보살펴 주었고, 과거 조건 없이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땅까지 주며 살도록 배려한 고마움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운조루를 지켜주었다고 했다.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이들 가운데 운조루 노비 출신이 있어서 운조루를 불태우려 했던 일을 막았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은 일이다. 쌀뒤주에서 나온 인심이 주변사람들까지 감동시켰던 이러한 운조루의 역사를 보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렇지만 타인능해의 정신은 운조루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일제하 다른 지주들과 달리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거부하고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운조루를 일제가 가만히 놓아 둘리는 만무했다. 식민통치의 토지조사 사업으로 인해 대부분의 농토를 빼앗기면서 운조루를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대부분의 지주들이 친일파가 되어 일족의 부와 권세를 축적하였던 사실과 비교하면 운조루의 몰락은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그 길을 함께 한 어떤 지사적 편린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더욱 가슴 아픈 사연은 운주루의 아홉 번째 주인이었던 류종택이 경찰에 끌려간 이후 소식이 끊긴 일이다. 주민들은 여순반란 사건 때 김지회 부대가 문수리골에 거점을 두고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오미동 마을 전봇대 일곱 개가 줄줄이 잘려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군경의 통신망을 끊어 놓기 위한 빨치산들의 작전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다음날, 경찰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류종택은 오미리 청년과 함께 빨치산과 내통하는 좌익으로 몰렸고 경찰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류종택은 오미리 청년들과 함께 시대의 불행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쥬
타인능해의 정신
운조루에는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선조들의 기록과 유물이 크게 훼손됨 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는 하나하나 호남지방 양반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류씨 집안에서는 수많은 서적들을 분류하여 보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30~40년 단위로 도서정리를 하여 그 상황을 기록하는 등 세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또한 매매계약서, 후손들의 일기, 치부책과 같은 자료에서부터, 장가들일 때의 제비용에 대한 기록, 장례시의 절차와 비용, 조문객의 명단, 심지어는 일제시대의 세금교부서와 영수증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사용된 문서와 기록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운조루에 보관되어 있었던 전적류는 320종 811권으로 이중 32종 145권은 1967년 성균관에 기증되었다. 이후 운조루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지난 89년 8월과 11월 두 차례 오미동 가옥도와 가보로 전해 내려오던 거북돌, 추사 김정희의 부친 김노경의 글씨와 김정희의 8폭 병풍 등, 많은 소장품이 도난당한 일이 발생했다. 지금 류씨 종친회에서는 도난을 우려하여 26종 636권의 자료를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대부분 가옥, 토지 이동에 관한 것이고 신분 및 혼인관계의 변천을 알수 있는 자료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생활용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대로 내려온 전승유물과 생활용품, 집기 도구들이 거의 훼손되거나 버려지지 않고 보관돼 있다. 운조루 민속박물관 건립이 필요한 이유이다. 류맹효씨는 민속박물관이 건립되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운조루 유물을 가져와 옛 영화를 재현하여 일반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운조루 민속박물관 건립을 지지하는 것은 바로 ‘타인능해’라는 뒤주 때문이다. 심심하면 매스컴을 장식하는 고위층 뇌물비리 사건들, 고위직에 있을 때 더 많은 부를 축적해서 자손만대까지 영화를 누리겠다고 혈안이 되어 동분서주하는 일부 부패 공직자들에게 운조루의 뒤주를 보여주고 싶다. 운조루가 세워진지 2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집은 쇠락 하여졌지만 타인능해의 정신만은 천왕봉보다도 높고,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의 물빛보다도 더 찬연히 빛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 비리공직자들을 운조루 곳간 채에 가두고 타인능해를 보여주며 그들의 선비정신을 생각해 보게 하고 싶은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운조루 사랑채 대청마루에 앉아 저 멀리 오봉산 자락을 바라보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노라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루빨리 운조루 민속박물관이 건립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