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반야봉 자락이 남으로 흘러 섬진강과 접한 자리에 우리나라 으뜸 명당이 펼쳐져 있다. 구례 운조루(雲鳥樓)는 이 땅의 대표적인 양택 길지다. 토지면(土旨面) 오미동(五美洞)이라는 지명 또한 멋지다. 그 자리가 금가락지가 떨어진 자리건, 금거북이가 묻힌 자리건 운조루 마루에 서서 보는 풍광은 수려하다. 등뒤는 후덕한 지리산이다. 뜰 앞에는 넓은 구만들을 적시며 섬진강이 서출동류로 흐르고 그 너머로 오봉산과 관모봉이 오덕(五德)을 갖추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다.
“좋구나. 천하대명당이 여기로다.”
동원(東園) 선생님의 예찬이다. 청년시절 일본에 건너가셔서 일생동안 공부하시고 8순을 넘겨서 귀국하신 당신은 역저 <주역해의> 3권을 출간하셨다. 중국과 일본의 역대 주석서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재해석한 명저였다. 그리고 지금은 후학을 양성하고 계신다.
선생님은 경상도 산골 태생이시다. 처음 해보신다는 이번 남도기행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호남평야와 웅장한 지리산에 흠뻑 매료되셨다. 영조 때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柳爾?)가 세운 99칸 운조루는 이번 남도기행의 꽃이었다.
우리가 운조루를 찾은 까닭은 몇가지 목적이 있었다. 주역은 변화의 원리와 불변의 도리를 말하는 수양서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따분한 연구실에서 한 때나마 벗어나보자는 것, 이 땅이 아직도 낯선 선생님께 지방풍물을 보여드리자는 생각, 날을 세우며 치밀한 논리를 즐기는 면면들간의 단합대회 등 여러 계산이 있었다. 우리는 벌써 2년째, 노 대가(大家)에게 매주 화요일 오후마다 주역을 배워왔다. 조상호 나남출판사 사장, 남중구 관훈클럽 이사장, 이광훈 논설고문, 이형성 박사, 이천승 박사, 그리고 소설쓰기보다 동양철학을 더 즐기는 필자가 선생님 문하생이다.
본래 주역이라는 게 동양 경전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터여서 우리들은 이따금씩 격론을 벌이곤 했다. 때로는 토씨 하나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자신의 인격을 돌아보게 하는 경계의 말씀을 대할 때는 주눅이 들었다. 구순을 바라보시는 선생님께서는 너그럽지만 분명한 가르침으로 일관하셨다. 말뿐만이 아닌 실천하는 학문을 하고 겨레의 앞길을 열어가라는 말씀이셨다. 지금껏 여러 선생님 밑에서 주역을 몇 차례나 강독했지만 워낙 어리석어놔서 그저 겨우 뜻만 짐작하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동원 선생님의 열성적인 가르침을 받을 때마다 부끄럽기만 했다.
여행이 곧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강의실을 벗어나보자고 제안했다. 운조루를 세운 류이주 후손의 초대형식을 취했다. 시인이자 건축과 교수인 류응교 선배님과는 학보사 학생기자회 멤버였고 각별한 친교가 있었다.
바쁜 사람들이 주말도 아닌 평일에 풍지관(風地觀)괘의 관광을 나섰다. 화엄사 입구에서 산채정식으로 점심하고 류응교 시인의 안내로 운조루를 돌아보았다. 워낙이 국이 잘 짜여진 명당이라서 흠잡을 데가 없다. 안산 너머 토고미(兎顧尾) 봉은 애니메이션 영화 대목같이 정겨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수구막이 조산(造山) 둥근 돌들은 강물이 아니라 마음 속에 흐르는 물을 더 오래 머물게 한다.
한 마디로 운조루 양택명당의 가치평가는 형식적인 구색갖춤에 있지 않았다. 그 속에 흐르는 정신이 더 위대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한 자선 쌀 뒤주는 그간 누차 언론에 소개되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진 쌀 뒤주는 주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구멍 마개를 열고 쌀을 가져갈 수 있었다. 배가 고파 쌀을 가져가는 이의 자존심을 배려해서 주인집 안채와 비켜선 자리에 두었다고 한다.
여성을 위한 누마루 배치도 놀랍다. 류씨 가문사람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페미니스트들이었던 것이다. 특히, 1851년부터 1936년에 걸친 농가 일기는 구한말과 일제 때 우리 농촌과 농업구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석두 박사는 이 관계 연구보고서를 여러편 썼다. 우리같은 문인들에게도 당대의 생활을 묘사해낼 좋은 자료다. 기록을 중시한 류씨 가문의 문향은 인근의 황매천 같은 묵객들을 불러들여서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오늘 우리가 운조루 누마루에서 역을 읽는 일은 이런 전통을 계승한다.
“과섭멸정(過涉滅頂)이니 흉(凶)하되 무구(无咎)하니라.”
지나치게 건너다가 머리까지 물에 빠졌으니 목숨을 잃어 흉하나 허물이 없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흉하고 큰 허물이 어디 있겠는가. 동원 선생님은 누차 이 대목을 강조하신다. 이런 대목을 바르게 해석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역을 배우는 참이치를 깨닫는단다.
“사람은 누구나 흉을 피하고 길함을 쫒지요. 그러나 큰 허물(大過)을 구하려는 일심으로 한 일이니 비록 개인적으로는 불행해도 도의상으로는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군자의 살신성인을 뜻합니다. 백이 숙제나 성삼문의 경우지요.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여기서 유래합니다.”
주역은 길흉보다 도의를 높게 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인심으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경지다.
운조루 류씨집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큰 대지주가 아니었다. 99칸이라는 규모도 요즘으로 치면 그렇게 웅장하달 수는 없다. 한 칸이 두어평 공간이었으니 커다란 접집 한 채면 20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 넉넉한 살림이 아니어서 간간이 빚을 내며 사는 형편이었음을 일기는 말한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배려했다. 벌어도 벌어도 늘 허기져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은 찾아볼 수 없다. 운조루에서 역을 읽으며, 진정한 귀족은 많이 소유하여 거드름피우는 데에 있지 않고 후덕한 마음씀에 있음을 배운다.
*이 글은 <풍수>, <바이칼>,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등의 장편소설을 펴낸 김종록 베스트 셀러 작가가 “월간 에세이” 9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