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타인능해(他人能解)

운조루 0 70

정상권 / 학교법인 성강학원 이사장 경영학박사


타인능해(他人能解)


전남 구례군 토지면에 오미리에는 문화류씨 10대 종가인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낙안군수 류이주 선생이 지은 99칸짜리 양반 가옥이다. 운조루가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곡절을 수없이 겪어야 했던 지리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230년이 넘은 가옥 60여간이 원형을 지키며 보존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둘째는 쌀이 3가마나 들어가는 쌀 뒤주 때문이다. 200여년 된 원통형 뒤주 아래 부분의 마개에는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인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있다. 즉 운조루의 주인은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를 열어서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운조루의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됐다고 전해진다. 동네에서 배를 곯는 사람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동네사람들이 운조루 뒤주에 가득 채워져 있는 쌀을 믿고 게으름을 피우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가능하면 자기보다 더 배고픈 사람을 위해서 웬만하면 운조루 뒤주를 찾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모양이다. 손만 뻗으면 언제나 쌀을 구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뒤주에 손대는 일을 줄였던 동네사람들의 마음은, 어쩌면 운조루 주인이 실천코자 했던 ‘나눔의 실천’과 일맥상통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말씀과 동의어라 할 것이고,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레제’의 전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월은 흘렀다. IMF를 전후해서 중산층이 얇아지고 절대부유층과 절대빈곤층이 증가함에 따라 양극화문제는 국가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눈에 불을 켜고 남의 떡에 침을 흘리는 세상(?)이 되었으니 각박한 세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지도층인사들조차도 언론사를 통해 “내가 이만큼 돈을 냈노라”고 밝힐 수 있어야만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세상이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전주시 금암1동사무소가 ‘타인능해’ 정신을 살려서 현관에 쌀뒤주를 설치해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누구나 원하는 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지난해 1월부터 금암새마을금고와 통장협의회, 새마을부녀회 회원 및 일반 주민이 기증한 쌀을 담아두고, 아래 서랍을 열면 5명 정도가 한 끼 밥을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쌀이 쏟아지도록 해둔 것이다. 금암동사무소의 쌀뒤주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낮보다는 밤에, 평일보다는 주말과 휴일에 찾아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끔 한 번에 많은 양을 퍼가는 사례도 생겨 아쉬움이 있지만,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크게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타인능해’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곳은 금암1동사무소만이 아니다. 정읍시 입암면사무소를 비롯해서 광주광역시의 금호1동? 주월동? 백운2동? 월산5동? 화정3동과 강원도 인제군 남면사무소 등 전국 각지에서 지역내 결식 주민들을 위해 사랑의 쌀뒤주를 운영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생색내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존심을 상하지 않을 수 있으니 ‘아름다운 선행’도 이만하면 백점짜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전주에서의 ‘타인능해’ 정신은 또 있다. 익명의 독지가가 연말만 되면 소외된 이웃을 돕는데 써달라며 노송동 동사무소에 7년째 거액을 내놓고 있는 미담이 그것이다. 다방면으로 알아봤지만 그저 40대 후반의 가장으로만 추정될 뿐인 이 익명의 독지가는 지난 2000년부터 매년 선행을 지속해왔는데 성금액수만도 무려 3천4백여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어디 쌀과 현금만이 ‘타인능해’의 정신이라할까. 운조루의 주인인 유이주 선생의 7대손인 전북대학교 건축공학과 유응교 교수도 선조의 ‘타인능해’ 정신을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건축학자임에도 최근 다섯 번째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한 유 교수는 이미 책선물이 취미라 할 만큼 많은 책들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육체의 양식이 쌀이고 정신의 양식이 책이라 한다면 책 선물은 ‘타인능해’ 정신의 또다른 실천이라 할 것이다. 유교수는 100년 동안 일기시를 써온 선조들의 내력을 본받아 지난해에는 거의 매일 7백여명에게 이메일로 자작시를 보내주어 후학들의 귀감이 되더니, 이 시들을 모아서 ‘꽃들에게 사랑을 묻는다’를 펴냈다. 분수에 맞게 살라는 문화유씨 집안의 가훈이 전주에서 올곧게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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