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이주는) 풍수설에도 또한 밝아 구례의 귀만에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삼수의 유배지에서 돌아와 형과 가족들을 이끌고 이 타향에 들어왔다.(중략)
세상사람들이 이 오미동의 집터를 길지라고 했었으나, 바위가 험하여 누구도 감히
집터로 활용하지를 못하였다.
공이 이에 웃으며 말하기를 '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 하면서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해 그 날로 터를 잡고, 사촌 동생의 집도 곁에 지어 마을을 이루게 하였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雲鳥樓)는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경상도 안동 태생 유이주(1726~1797)가 터를 잡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는 글(유이주 행장 일부)이다. 풍수설에 따라 그곳을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명당으로 인식하고 집을 지은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받아들였다고 하겠다.
명당을 찾고, 이상적인 삶의 터를 찾아온 이는 유씨 일가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 마을 주변으로 길지를 찾아 1910년대 초부터 일제 강점기 무렵 전국 각지로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충청, 경상, 전라지역의 양반들이 100여호나 옮겨왔다고 한다.
지리산에 있다는 이상향을 찾는 발걸음은 선인들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유토피아는 청학동(靑鶴洞)이었다. 고려시대 이인로(1152~1220)는 청학동을 처음으로 찾아나선 다음 글을 남겼다.
▲ 지리산 자락 아래 자리잡은 운조루. 지리산에는 길지를 찾아, 이상의 땅을 찾아 들어온 이들이 역사적으로 쉼없이 이어져 왔다./김영근 기자"옛날 노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다. 길이 매우 좁아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몇 리쯤 가면 넓게 확 트인 드넓은 곳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엔 사방에 모두 비옥한 땅이 널려 있어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그러나 오직 푸른 학만이 그 안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인로는 결국 청학동을 찾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도 청학동을 찾는 발길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 사림 김일손(1464~1498)도 기록을 남겼다. 청학동이 불일평전이라고 전해 듣고 올랐으나, "계곡이 아주 험하여 짐승이 아니고는 잘 다질 수 없으니, 처자를 둘 데가 없고, 가축을 기를 곳이 없다"고 했다. 사람마다 달랐다. 조식(1501~1572)은 불일암, 서산대사(1520~1604) 화개동 동쪽, 허목(1595~1682)은 불일전대 남쪽 골짜기를 각기 청학동으로 꼽기도 했다. 불일폭포 주변이나 덕평봉 아래 평원이라고도 했다. 지금도 '청학동'이라고 해서 생긴 마을이 있다. 하지만 지리산에 있다는 청학동은 사람들의 마음속, 상상 속의 유토피아일 따름이다.
길지를 찾아, 유토피아를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간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직접 뛰어든 이들도 있었다. 지난 번 글에서 '지리산은 저항의 공간'이라고도 한 것을 뒤집으면 똑 같다. 나름대로 꿈꾸는 이상사회를 향한 저항의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백성의 (피를 빨아 먹는) 이를 모조리 훑어 없애달라"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1594년 지리산 의적으로 일어선 임걸년을 비롯,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지리산을 근거지로 반란과 저항을 했던 숱한 무리들이 있었다. 동학농민군들에 이어 해방전후, 여순사건,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지리산 골짜기에서 갖가지 이상사회를 꿈꾸는, 혹자가 말하는 '반역의 불꽃'이 명멸했다.
이렇듯 지리산은 그 품속에 무수한 사람들을 안아왔다. 이중환(1690~?)은 '택리지'에서
그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길 골이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쪽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이 있고, 나라에 세도 바치지 아니한다.(중략) 중이나 속인이 대를 꺾고 감 밤을 주워서 수고하지 않아도 생리(生利)가 족하며, 농부와 공장(工匠)이 또한 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충족하다. 이리하여 이 산에 사는 백성은 풍년 흉년을
모르므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그런 지리산을 오늘도 숱한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