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특별기고]재난기간 ‘베풂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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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욱 소방방재청장


전남 구례에 가면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의 운조루(雲鳥樓)라는 곳이 있다. 조선 영조 52년에 낙안 부사를 지낸 안동 사람 유이주가 세운 99칸 대저택으로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에 곳간 채가 있다. 이곳에는 둥근 통나무를 파서 만든 절구통 모양의 뒤주 하나가 놓여 있다.


그 뒤주 아래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으로 누구나 쌀이 필요하면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인이 굳이 가난한 사람을 직접 돕지 않고 뒤주를 마련해서 쌀을 퍼 가게 한 것은 도움받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배려한 아름다운 ‘베풂의 미학’이라 생각한다. 더더욱 쌀을 가져간 사람들도 꼭 필요한 한두 되 정도만 가져갔다니 진정한 나눔의 실천이었음이 틀림없다.


올해도 폭염이나 태풍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자연의 거대한 위력은 인간의 의지와 힘을 또다시 시험에 들게 할 것이다. 한사람의 안타까운 희생도 없기를 염원하는 것은 비단 자연 재난과 사투를 벌이는 재난 관리 종사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운조루의 주인과 같이 재난 극복에도 정성과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둔 생명 소중함을 실천하는 책임 의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해마다 여름철 안전관리 종합 대책을 잘 수립해 적극적으로 대응해도 그 결과는 인재(人災)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 만큼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다.


그러나 최선의 예방책을 강구한다면 인명 피해는 최소화되리라 확신한다. 재난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순응하며 제사만이 유일한 예방책이라고 믿었던 옛 조상들의 마음이나 오늘날 과학적 근거에 따라 재난을 극복하려는 그 마음은 마찬가지다.


헌법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재난의 현장성과 의외성이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재난 피해 방지를 위해 국민 스스로가 자율 방재 의식을 갖고 실천해야 하나 재난 사고만 터지면 ‘정부가 다 알아서 해 주겠지’라는 도덕적 해이 현상마저 아직까지 잔존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올해 초 서남아시아의 지진해일(쓰나미) 피해 지원금으로 73억원을 내놓고 사회복지시설과 단체에 대한 지속적인 후원을 통해 소외된 이웃을 보살펴 ‘2005년 이웃돕기 유공자 포상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L기업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화염과 구조 구급 현장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소방 공무원 부부 200쌍을 매년 초청해 화염보다 뜨거운 정성과 사랑을 베풀고 있는 S기업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그래도 위안을 삼아 본다.


해마다 이재민을 돕는다고 모금함을 찾는 어린 고사리손들의 ‘나눔의 세상’ 또한 아름답게 비치는 등불이다.


‘나눔의 문화’는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다. ‘콩 한 쪽도 열 사람이 나눠 먹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나눔과 기부는 여유가 있거나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조루의 뒤주에서 보여준 집주인의 선한 베풂과 쓰나미 피해 돕기에 앞장선 대기업의 아름다움이나, 이재민들을 돕겠다고 모금에 나선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찾아볼 수 있다.


본격적인 여름철 재난 기간에 들어선 지금, 집을 잃거나 가족과 생이별하고 방황하는 이재민들이 본의 아니게 생길지 모른다.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부의 복구 정책도 중요하지만 가슴으로 다가오는 우리 주위의 따스한 위로와 재난 기부금이 넘쳐 난다는 소식이 회자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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